
선명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나은 이유: 시간을 두 번 사는 사람들의 비밀
"기억은 우리를 속이지만, 기록은 우리를 기다려줍니다. 2025년의 끝자락, 휘발되는 시간 속에서 나를 지켜낼 '희미한 연필 자국'의 힘에 대하여. 2026년을 준비하는 기록하는 삶을 제안합니다.
흐르는 시간의 틈새에서
창밖의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이제는 겉옷의 깃을 여미지 않고서는 거리를 걷기 힘든 계절입니다. 거리에는 연말 특유의 들뜬 활기보다, 지나온 일 년을 가만히 반추하며 걷는 이들의 고즈넉한 뒷모습이 더 자주 눈에 띕니다. 이맘때면 우리는 습관처럼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벌써 일 년이 다 갔네, 도대체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걸까?"
사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정직하게 흘렀을 것입니다. 봄의 연한 잎사귀가 돋아나던 순간부터, 여름의 매미 소리가 정수리를 때리던 날을 지나,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발치에 차이던 어제까지. 시간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지요. 다만 우리의 기억이 그 촘촘한 시간의 결을 다 담아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 빠르다'고 말함으로써, 기록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삶의 공백을 변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참으로 연약하고 때로는 기만적입니다. 뜨거웠던 여름의 서슬 퍼런 다짐도, 가슴을 저미던 가을의 서늘한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뭉툭해진 모서리처럼 희미해집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처럼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과거를 멋대로 편집합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생존을 위해 지워버리고, 행복했던 기억은 과장하며 우리는 매일 조금씩 '어제의 나'를 잃어버리며 살아갑니다.
휘발되는 기억과 멈춰있는 기록
우리는 스스로의 기억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요한 순간은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그날의 감정과 다짐은 선명하게 남을 거라고 믿지요.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참으로 연약하고 때로는 기만적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기억이 사진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뇌는 사실을 그대로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믿음으로 덧칠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지금의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과거를 편집하며 우리는 매일 조금씩 '진짜 어제의 나'를 잃어버립니다.
6월의 어느 오후, 누군가와 나눈 대화. 그때 나는 분명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건 잊으면 안 돼, 라고 속으로 되뇌었지요. 그런데 지금, 그 깨달음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감정의 결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기록하지 않은 생각은 이렇게 증발합니다. 말로만 다짐한 것들은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기록한다는 것은, 거를 수 없는 시간의 거대한 강물 위에 나만의 작은 둑을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가는 부표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떤 사소한 풍경에 마음이 머물렀는지를 적는 행위는, 무색무취하게 증발해버릴 뻔한 나의 하루에 유일무이한 의미라는 색채를 입히는 작업입니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선명한 기억을 이긴다
그래서일까요. "희미한 연필 자국이 선명한 기억보다 낫다"는 격언은 연말의 책상 앞에서 더욱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기억은 선명해 보이지만 신뢰할 수 없고, 기록은 희미해 보이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종이 위에 내려앉은 흑연 가루나 모니터의 활자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정직하게 우리를 기다립니다. 어설프게 적어 내려간 일기 한 줄, 영수증 뒷면에 휘갈긴 짧은 메모는 그 순간의 온도와 습도까지 박제해 둡니다.
몇 년 전에 휘갈겨 쓴 일기장을 펼치면 우리는 비로소 그때의 나와 마주합니다. 지금의 내가 미화하거나 합리화할 틈도 없이, 그날의 감정이 날것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놀랍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을 통과해왔다는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록한다는 것은 거를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나만의 작은 둑을 세우는 일입니다.
시간을 두 번 사는 사람들의 비밀
기록의 가장 신비로운 지점은 우리가 기록을 통해 '시간을 다시 살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일기를 쓰는 그 고요한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낮에 겪었던 일을 마음의 눈으로 다시 한번 응시합니다. 타인에게 무심코 내뱉었던 말의 무게를 뒤늦게 가늠해 보기도 하고,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나 자신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어냅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재구성입니다. 쓰는 순간,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에서 관찰자가 됩니다. 낮의 내가 '삶을 살아내는 존재'였다면, 밤에 기록하는 나는 '삶을 해석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비로소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킵니다.
그 짧은 기록의 순간, 우리는 남들보다 '한 번 더' 인생을 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육체로 살고, 또 한 번은 문장으로 사는 셈이지요. 우리는 한 번은 그 순간을 살면서 경험합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그것을 글로 쓰면서 다시 삽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그 시간 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갑니다. 그렇게 기록은 시간을 붙잡는 손이 됩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그것이 바로 기록입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다시 읽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의 나를 만나고, 그때의 공기를 느끼고, 그때의 마음을 되살립니다. 기록은 타임머신이 되고, 우리는 시간 여행자가 됩니다.
기록하지 않아 잃어버린 것들
기록하지 않아 후회되는 순간들은 늘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아팠던 지점들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었던 그 밤의 다정한 농담들, 어느 퇴근길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며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고독의 정체, 아이가 처음으로 내뱉은 서툰 단어의 울림들. 말로만 내뱉고 공기 중으로 흩뿌려진 그 감정들은 이제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년 여름, 친구와 나눈 긴 통화.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웃었고, 위로했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생각했지요. 오늘 참 좋은 대화를 했네. 그런데 지금, 그 대화의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분위기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날 통화를 끝낸 직후, 단 세 줄만이라도 메모해뒀다면.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억 속에 영원할 거야"라고 호기롭게 약속하지만, 사실 그 약속만큼 공허한 것도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은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십 년 전 오늘, 나는 어떤 고민에 밤잠을 설쳤을까요? 오 년 전 이 계절에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기록이 없다면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로부터 소외된 이방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록의 부재는 기억의 왜곡을 낳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지금의 잣대로 심판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미화합니다. 하지만 오래전 적어둔 일기장을 들춰보면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낯설고도 생생한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 서툴고 부끄러운 문장들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을 통과해왔다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거창하지 않은 시작을 위하여
기록은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장의 수려함이나 논리적 완결성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기록은 나 자신을 향한 가장 정중하고도 애틋한 예의입니다. 블로그의 짧은 포스팅이든, 스마트폰 메모 앱에 적은 몇 자의 글귀든, 혹은 수첩 귀퉁이의 낙서든 상관없습니다.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펜을 쥐거나 자판을 두드리는 그 짧은 찰나에, 우리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려던 시간이 잠시 멈춰 서서 우리와 눈을 맞춥니다. 그 멈춤의 순간들이 모여 삶의 밀도가 됩니다.
완벽하게 기록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모든 순간을 다 담아내겠다는 욕심은 오히려 기록을 숙제로 만듭니다. 빈틈이 많아도 좋습니다. 훗날 그 희미한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행간에 숨어있는 그때의 공기와 당신의 진심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날 것입니다. 빈틈 많은 기록일지라도, 그것은 훗날 당신이 길을 잃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오늘 만난 사람의 이름, 오늘 느낀 감정의 색깔, 오늘 마신 커피의 맛.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쌓여서 한 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을 기록해두면, 나중에 그것들이 내 삶의 결을 보여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어떻게 변해왔는지.
다시 만날 나를 위한 다짐
이제 곧 새로운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첫 페이지의 하얀 공간을 마주하게 될 계절입니다. 그 백지는 단순히 날짜가 적힌 칸이 아니라, 당신이 다시 살게 될 시간의 영토입니다.
기록은 생산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하루를 정리하며 남기는 문장들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이며, 휘발되는 인생을 붙잡아 두려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저항입니다. 과거의 나와 대화하고, 현재의 나를 확인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흔적을 남기는 일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그리고 내년의 첫 페이지를 열며 당신의 손끝에서 시작될 그 희미한 연필 자국들을 응원합니다. 그 작은 흔적들이 쌓여 당신을 지탱해 줄 단단한 뿌리가 되고, 거친 세상을 견디게 할 따뜻한 외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록하는 당신은, 남들보다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넓게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누리는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26년, 당신이 시간을 두 번 사는 사람이 되기를. 기록하는 삶 속에서, 당신 자신을 더 깊이 만나기를.
이 글이 당신의 첫 기록을 시작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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