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⑥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용기 – 까베르네 소비뇽과 아들러
까베르네 소비뇽을 처음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색이다. 깊은 루비, 때로는 거의 검은 보라에 가까운 짙은 색. 잔을 기울여 빛에 비춰보면 가장자리에서만 간신히 붉은 기운이 새어 나온다. 투명하게 비치는 가벼운 로제나, 밝은 루비빛으로 경쾌함을 자랑하는 피노 누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까베르네 소비뇽의 색은 처음부터 선언한다. "나는 가볍지 않다"고.
병의 어깨는 높고 각이 져 있다. 보르도 스타일의 전형적인 형태로, 마치 군인의 견장처럼 단단한 인상을 준다. 라벨 역시 대부분 절제되어 있다. 화려한 일러스트보다는 샤토의 이름, 빈티지, 산지가 간결하게 새겨진 경우가 많다. 장식보다 본질로 말하는 와인. 겉모습만으로도 이 와인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다. 쉽게 다가서기 어렵지만, 한번 마주하면 오래 기억에 남는 존재.
코르크를 열고 잔에 따르면 진한 향이 올라온다. 블랙커런트, 블랙체리 같은 검은 과일의 농밀함. 그 뒤로 피망이나 유칼립투스 같은 허브 향, 오크 숙성에서 온 바닐라와 삼나무 냄새가 겹겹이 쌓인다. 한 가지 향이 아니라 여러 층위가 동시에 펼쳐지는 복잡성. 첫인상은 강렬하지만, 시간을 두고 맡을수록 더 많은 것이 드러난다.
급하게 접근하면 그저 '진하다'로만 끝나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맛. 까베르네 소비뇽의 가장 큰 특징은 타닌이다. 입안을 꽉 조이는 듯한 떫은맛, 잇몸과 혀를 감싸는 강한 구조감. 타닌은 와인의 뼈대이자 방어막이다. 이 타닌 덕분에 까베르네 소비뇽은 오래 숙성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는 부담스럽다. "너무 세다", "입이 마른다"는 반응이 나온다. 모두에게 사랑받기에는 너무 뚜렷한 개성. 그러나 이 타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까베르네 소비뇽은 다른 어떤 와인보다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된다.
아들러의 심리학도 이와 닮았다. 그의 이론은 처음 접할 때 다소 거칠게 느껴진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말들은 우리가 평생 배워온 관계의 문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말아야 한다,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는 교육 속에서 자란 우리에게, 아들러의 말은 마치 타닌처럼 입안을 조이는 불편함을 준다.
하지만 그 불편함 뒤에 단단한 구조가 있다. 아들러가 말하는 '과제의 분리'는 명확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선택과 행동까지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나를 좋아할지 말지는 상대의 과제다. 이 경계를 흐리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잃는다. 아들러의 철학은 우리를 보호하는 경계선이다. 까베르네 소비뇽의 타닌이 와인을 오래 보존하듯, 이 명확한 경계는 우리 자신을 지킨다.
까베르네 소비뇽은 블렌딩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메를로와 섞여 타닌을 부드럽게 만들고, 까베르네 프랑과 만나 향에 깊이를 더한다. 하지만 블렌딩 속에서도 까베르네 소비뇽은 자기 존재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품종과 어우러지면서도 주축을 이루며, 전체의 방향을 이끈다. 타협하되 자신을 지우지 않는 것. 관계 속에서도 나를 유지하는 것.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도 이와 통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타인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로 단단히 서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다는 의미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나를 굽히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두려움의 표현이다. 나답게 서되, 상대도 그 자신으로 설 수 있도록 경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관계다.
병의 무게감, 색의 깊이, 타닌의 강인함. 까베르네 소비뇽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안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깊이 사랑받는다. 아들러의 철학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편안한 위로가 아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날카롭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환상에서, 나를 지우며 사는 고통에서 우리를 꺼내준다.
까베르네 소비뇽 한 병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 앞에 선다는 것과 같다. 이 와인을 마주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가볍게 즐기려는 마음으로는 부족하다. 시간을 두고, 마음을 열고, 그 복잡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들러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용기는, 쉽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이해하고 나면, 그보다 단단한 지지대는 없다.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은, 결국 내가 나답게 서 있을 때 생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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