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해진다는 것 – 시라와인 (Syrah) 과 니체
밤이 깊어지는 시간, 시라 와인은 유리 속에서 거의 검은빛에 가까운 짙은 자줏빛을 드러낸다. 처음엔 빛을 밀어내는 듯하지만, 촛불 가까이 가져가면 어둠 속 가장자리에서 붉은 빛이 조용히 번진다. 여전히 어둡지만, 빛을 머금은 어둠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검은 과실의 향이 먼저 다가온다. 블랙베리와 블랙커런트, 말린 허브와 후추의 스파이시함.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무게는 묵직하지만, 삼키고 나면 그 무게가 오히려 편안함처럼 느껴진다. 이 와인은 가벼운 술이 아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 여리고 섬세한 결을 품고 있는 사람과 닮았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마음 한쪽이 쓰라린 밤이라면, 시라는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와인이다. 시라는 짙고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은 빛을 거부하는 어둠이 아니라, 빛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어둠이다. 빛의 각도에 따라 루비빛이 비치는 것처럼, 상처를 가진 사람도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빛을 만나면 마음속 깊은 곳의 부드러움을 내비친다.
니체는 말했다. 강해진다는 것은 상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고. 상처를 지워버리는 능력이 강함이 아니라, 그 상처 위로 다른 빛을 비추는 것이 진짜 강함이라고.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강해지려면 완벽히 잊고, 아픔을 극복해야 한다고. 그래서 스스로를 다그친다.
"왜 아직도 이 일을 못 잊지?",
"다른 사람들은 다 넘어섰는데 왜 나는 이럴까?"
하지만 니체에게 그런 질문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흉터는 피부 위에 남는다. 중요한 건 그 흉터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것을 숨기고 싶은 흔적으로 남길지, 아니면 그 위에 나만의 의미를 새겨 넣을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을 ‘초인’이라 불렀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위에 자기 이야기를 새겨 넣는 사람.
그의 말,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 좋은 일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픈 것도, 찬란한 것도 모두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지우려 하지 말고 함께 걸어가라는 뜻이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상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로도 빛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시라의 어둠도 그렇게 달라 보인다. 같은 어둠인데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루비빛이 번진다. 상처가 그대로인데도, 비추는 시선이 달라졌을 때 삶의 결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 모두 상처를 안고 산다. 실패한 일, 끝내 풀지 못한 관계, 스스로에게 쏘아붙였던 가혹한 말들. 그런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때로는 밤마다 되살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강해지려 애쓴다. 빨리 잊으려고, 더 단단해지려고, 더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강해진다는 것은 상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빛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번아웃으로 쓰러졌던 날을 “내가 나를 너무 몰아붙인 걸 알게 된 날”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끝나버린 관계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분명히 알게 된 시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책으로 뒤척였던 밤들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그것이 빛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니체의 유명한 말,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이 문장을 오해한다. 고통을 견디기만 하면 자동으로 강해지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그냥 버티기만 하면 상처만 쌓인다. 그러나 그 상처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제서야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시라의 여운이 입 안에 남는다. 묵직하고 깊고 조금은 쓰지만 마지막엔 부드럽다. 오늘의 나 역시 상처를 지우지는 못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후회도 있다. 하지만 빛의 방향을 아주 조금은 바꾸어 보았다. 그걸로 충분하다.
강해진다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다. 상처를 지우지 않고도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힘.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는 과정.
오늘 밤, 시라 한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물어보면 좋겠다.
내 상처는 지금 어떤 빛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빛의 방향을, 나는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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